[19-80일] 6주 휴가 기간 & 복귀 시작 무렵 The baby and I

한국에 있었을 때는 친구들과 임신이나 육아에 관련할 이야기를 하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
 - 다들 어렸었구나 하고 생각하기엔, 또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미혼자들이 대부분이다보니 아무래도 그런 화제거리로 이야기할 일이 없었나 보다.
이제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온지 건 10년이 넘어간다.
이제서야 뒤늦게 아기를 가지고 한국의 사정이랑 비교를 해봤을 때, 일단 부럽다면 부러운 건 임신 휴가기간이다.
 - 긴 휴가기간 갔다가 돌아오면, 책상이 사라지고 없더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는데, 아직 그런건지, 이제는 좀 더 보장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미국의 산후 휴가는 전세계에서 밑바닥을 헤매는 수준으로 유명하다.
그나마 나의 경우는 그나마 나쁘지 않은 경우라고 생각한다 - 일단 6주라도 유급 휴가가 있으니까. 그게 어디야.

아기가 태어난지 1년 안에 6주 유급 휴가와 6주 무급 휴가를 쓸 수 있는데, 나는 유급 휴가만 일단 생각하기로 했다.
 - 휴가 중이라고 해도 완전히 일에서 떨어지긴 힘들어서, 정말정말 필요하고 간단한 일들은 할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무급 휴가동안에도 그럴 거 같아서 무급휴가를 쓰기가 정말 싫은 거다. -_- 
휴가 기간에 일한다고 남편한데 살짝 혼났다. 근데, 어느정도는 세상에서 엄마가 아닌 내가 존재한다는 걸 가끔씩 기억시켜줘서,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라고 생각한다. 일단 휴가기간에 일하는 거니까, 딱히 밖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그렇게 많진 않았고. 일한다고 해도 대충 이메일 확인하고, 중요한 회의 들어가는 정도밖에 안 했고.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일에 복귀해서도 업무를 따라잡는게 힘들다거나 하는 건 없었다.

미르는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병원에서와 같은 생활을 했다.
미성숙아라 그런지, 처음에는 배가 고파도 별로 울질 않았다.
그래서, 한 몇주쯤은 남편이랑 나랑 조를 짜서 3시간마다 미르를 먹였다. 
제일 힘든 쉬프트는 역시 야간 쉬프트였지만, 두 사람이서 나눠 하니까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다. 
 - 한 사람이 자정과 새벽 3시에 우유를 먹이고나면, 다음 사람이 아침 6시에 먹이는 식이으로.
남편이 다른 지역에 가 있을때에는 다행히 친정 어머니께서 2주 정도 미국으로 오셔서 도와주셔서 어떻게 넘어갔던 것 같다.
밤이랑 새벽 수유를 어떻게 해놓으면, 아침이나 점심무렵 어머니가 돌봐주시는 동안 잠을 청할 수 있었으니.

미르가 거의 직수가 아닌 유축이나 분유로 커서, 이런 점은 편했다.
내가 직수로 다 감당해야 했다면, 아마 무지하게 힘들었겠지. 
 - 나중에 따로 쓰겠지만, 미르는 꽤 한동안 힘이 약해서, 직수만으로 제대로 영양을 공급해주기가 쉽지 않았다. 1시간에 잠자가며20-30ml 겨우 빠는 정도였으니까.

젖병으로 먹으면서 엄청나게 흘려서, 트름받침용으로 나오는 작은 수건들을 받치고 먹이면, 수건이 흥건히 젖곤 했었다.
덕분에 트름받침용 수건만 집에 열몇개씩 사재어 뒀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미르는 천천히 발달과정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집에 와서 한달인가 지났을까, 슬슬 배가 고프면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게 얼마나 반갑던지.
...물론 나중에 왜 우는지 모르겠는데, 건 두어시간을 찡얼찡얼대는 아기를 안고 멘붕하는 나날들을 보내며, 이 때의 감사함은 거의 깡그리 잊어버렸지만.

처음에는 젖병을 너무 기울이면, 미성숙아 젖꼭지를 사용하고도 입에 들어가는 우유양이 너무 많아서 켁켁거리곤 했었는데, 휴가기간 후반기에는 문제없이 받아먹기 시작했다. 

젖병으로 젖을 먹을때나 바로 먹고나서는 몸에 뼈가 없는 헝겊인형처럼 축 늘어지거나 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좀 더 몸에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울기 시작한 게 반가웠던 건 잠깐, 언젠가부터 오후무렵이 되면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짜증을 내며 울어대서, 한동안 우리 아기가 콜릭(영아산통)인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더랬다. 병원에 가서 물어봤더니, 이 무렵의 아기들은 그렇다고, 한 3개월 지나면 나아지기 시작하고, 6개월이면 거의 사라진다고 해서, 이 시간을 잘 버티자 싶었더랬다.
그렇지만, 정말, 배고픈 것도 아니고, 기저귀를 갈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도 울어대서 힘들었다. 
아기 의자에 앉혀놓고 열심히 흔들어주면 겨우 멈추는 정도?
무엇보다 소통이 안 된다는 게 힘들었다. 아무리 내가 이렇게 달래주고 있어도 전혀 반응을 안 해주니까.
아기가 미워진다거나 하진 않았다. 이 조그만게 뭘 알겠어, 싶어서. 
그저, 큰 어른 둘이서 능력 닿는데까지는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은데, 우리는 어디가 불편한지 모르고, 아기는 그런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 상황이 힘들었다. 이에 수면부족까지 겹치니, 가끔 며칠은 정말 힘들어서 넋이 나갈 것 같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3개월 즈음부터 서서히 이런 기간들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너무 조금씩 사라져서, 과연 사라지고 있는게 맞나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지만, 어느샌가 사라져 있는 - 아기 발달의 마법.

나중에 같이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사람의 아기는 정말 영아산통을 겪는게 맞았다.
그 어떤 걸 해도 듣지 않고, 하루 대여섯시간을 울어재껴서 그네들은 소음 제거 해드폰을 번갈아 끼며 애를 돌봤단다.
(다행히 6개월부터는 매우 행복한 아기가 되었다고.)

미르가 7개월째인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득한 이야기이다.
미르는 요새도 가끔 짜증내며 울기도 하지만, 그 울음은 1,20분을 넘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가 달래려고 노력하면, 그걸 받아들이는 게 눈에 보이니까, 확실히 마음이 편하다.

지금에 와서는 기억조차 어렴풋하지만, 그럴때가 있었다.
미르의 눈동자에 초점이란 게 잡히지 않아, 과연 이 아이가 얼마만큼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지 몇번이나 생각해보던.
어렴풋한 형상만이 간신히 보이는 시야에, 배에 가스가 생겨서 불편하다는 것 이외에는 시간의 흐름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우는 것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던 그런 조그만 아기. 그런 미르의 세상은 어떻것일까 몇번이나 생각해보던.

[0-18d] 신생아중환자실->신생아 입원실 기간

미성숙아로 태어난 데다가, 양수가 먼저 터졌기 때문에 미르는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해야했다.
처음 안아봤던 아기가 너무 작아서 놀랬다면, 몸을 추스려서 신생화 중환자실에서 본 아기는 애처로울 정도로 이런저런 기계들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우선, 양수가 먼저 터진 것 때문에 혹시 모를 세균 감염을 방지하기 위한 항생제와 수분공급을 위한 식염수, 심박동과 호흡 산소량을 측정하는 기계 등 이것저것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자체 체온 조절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히터와 에어컨디션이 달려 있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 미르는 그래도 신생아 중환자실에서는 큰 쪽이 속한 편이었고, 혼자 별다른 문제없이 숨을 쉴 수 있는 편이라 달려있는 모니터며 기계가 그나마 작은 편이었다. 

병원에는 가능하면 아기와 부모와의 접촉을 많이 하도록 추천해 줬기 때문에, 나랑 남편은 시간 나는 대로 번갈아 아기를 안고 있곤 했다. 아기 몸에 주렁주렁 메달려 있는 연결선들 중 몇개는 아기의 배꼽을 통해 연결되어 있어서, 아기를 안아 보기 위해서는 이 모든 연결선들이 심하게 당겨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가끔 심박동이나 산소량이나 체온이 정상치를 벗어나면, 인큐베이터가 삑삑거리는 경고음을 날리고 금새 간호사가 달려온다.
건 3주간 모니터들과 경고음에 익숙해져서, 막 퇴원했을 때는 혹시 산소량이 부족하지나 않나, 모니터가 없는데 어떻게 알아채나 꽤나 걱정했었다. 자다가 일어나서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잠을 청하는 일을 한 3개월쯤 했던 것 같다.

5일 동안 중환자실에 있던 미르는 모든 검사에서 안정적이라는 진단을 받고, 신생아 입원실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는 좀 더 여유있는 분위기로, 각 방마다 두 명의 아기가 배정받는다.
미르는 한 이주 정도 이곳에 머무르다 퇴원했다.

퇴원을 하기 위해서는 이틀동안 인큐베이터 밖에서 문제없이 체온조절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코에 달린 튜브를 통하지 않고 직접 모든 식사를 받아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두 가지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통과하면, 시력,청력 등의 검사를 하고, 카시트에 문제없이 2시간을 앉아 있는지 테스트한다.
이 테스트를 넘기고 나면, 집에 가도 된다는 허가를 받게 된다.

이렇게 모든 테스트를 넘기기 전까지, 미르는 건 3주 동안 병원에 있었다. 그 3주동안 나는 비교적 쉽게 몸을 추스릴 수 있었다.
보통으로 태어난 아기들의 경우, 아무래도 부모들이 처음 며칠을 잠을 못 이뤘을테지만, 내 경우는 저녁 6시면 집에 와서 그나마 집에서 편하게 잘 수 있었으니까.
아기가 젖을 직접 빠는게 아니라 100% 유축을 하는 거라, 혹시 젖량이 부족하면 어쩌나 싶어서 4시간에 한번씩 유축을 했다.
그러니까 평소보단 잠을 못 자긴했지만, 미르가 집에 돌아온 뒤와 비교하면 이땐 정말 출산후 몸 회복하는 것 말고는 크게 신경쓸 게 없었으니 많이 편했지.

나나 남편이나 미르가 첫 아기인데다 예정보다 훨씬 빨리 태어나는 바람에 정말 어떻게 아기를 돌볼지 준비된 게 없었는데,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하는 거 보면서 많이 배웠다.
어떻게 기저귀를 가는 게 좋은지, 트름은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등등을 비롯해서, 어떤 물품들이 많이 필요할까 하는것들을 미리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도 미르가 미성숙아 치고는 그나마 건강한 편이라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지만,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중환자실의 정말 조그마한 아기들을 보고 있으면 많이 안스러웠다.

병원이 사무실 근처라 어거지로 휴가를 미루며 강행돌파. 물론 말은 일한다고 해도, 효율이 무지하게 낮았으니, 사실상 눈감아준 보스에게 감사할 일이다. (나름 여름휴가도 안 썼으니까, 완전 월급 도둑같은 일을 한 건 아니라고 스스로 애써 변명을 해보긴 하지만. )

그렇게 18일 후, 미르는 병원에서 퇴원했고, 나의 6주간 육아 휴가가 시작되었다. 

출산의 기억 (3) The baby and I

출산의 기억 (2)

나름 고통에 대한 참을성은 어느정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사람들이 아프다고 하는 내진도 별로 문제 없었고 해서, 그런 오만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악소리 나게 아팠던 건 정말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을 때도, 놀이기구에서 장난치다가 머리를 다쳐서 대여섯바늘 꿰매야 할때도 아프긴 해었다.
하지만, 진통의 무서운 점은 그 악소리 나는 아픔이 주기적으로 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진통측정기를 보고 있으면, 초단위보다 정확하게 언제쯤 그 악소리나는 고통이 밀려들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긴장이 된달까.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참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가면 갈 수록 심해져서 나중에는 진통이 가장 심할때는 정말 숨을 잠시 멈추고 이불시트를 꽉 잡아당기면서 겨우겨우 넘길 수 있는 정도였다. 
새벽무렵쯤에는 진통이 너무 심해서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숨을 멈추면서까지 참을 정도라면, 과연 참는게 맞는걸까 싶기도 했다. 
결국 새벽 1시쯤 간호사에게 고통을 호소했더니, 한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더니 진통제를 놔 주겠단다.
단지 이 진통제는 아기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주 놓을 수 없다고 한다.
새벽무렵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인지, 주문한 진통제가 병실에 배달되기까지는 건 몇 시간이 걸렸다.

그 진통제의 효과는 아직까지 기억한다.
진통제가 돌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한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진통제가 뇌를 순간적으로 마비시키는 게 느껴지면서, 숨이 쉬어지지 않더라.
뭐랄까, 숨을 쉬는 근육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달까.
나는 당황해서 '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외치고, 간호사랑 친구는 '계속 숨을 쉬세요'라고 응원하고.
다행히 그 순간은 몇 초 만에 지나갔지만, 한순간 정말 무서웠다.

어쨋튼 강력한 진통제떄문에 어느정도 진통의 고통은 누그러졌다.
아주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무시하고 쪽잠을 청할만큼은 되었다.
덕분에 쪽잠이나마 2-3시간정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진통제 기운이 사라진 탓인지 다시 고통스럽고 주기적인 진통이 몰려왔다.
문제는 아직 자궁구가 반도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한 몇시간 진통을 참다가, 너무 힘들어서 다시 진통제를 요청했다.
그렇지만, 의사선생님들은 그런 강력한 진통제를 너무 자주 맞는건 태아에게 좋지 않다고 하며, 요청을 거부하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선생님들의 의견이 달라졌다.
언젠가부터 내 진통이 최고점을 달할때 마다, 아기의 심박동이 느려지는 것이 관찰된 것이다.
태아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 의사선생님들은 유도분만을 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옥시토신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무통분만을 할건지 묻길래 나는 한다고 대답했다.
그 전날밤, 진통이 오기 전에 마취의사가 에피두럴에 대해 질문사항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해서, 이것저것 물어본 결과, 딱히 부작용이 크지 않다는 결론을 냈기 때문이다.
무통분만에 대해서는 육아밸리에서 많이 읽어봤지만, 진통제가 들어가는 순간 거의 80%의 진통이 사라졌다.
무서울 정도의 효과였다.

그때 즈음, 지구를 반바퀴 이상 돌아서 남편이 도착했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수염도 못 깎아서 나보다 더 힘든 모습을 하고 나타난 남편 앞에서 고통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유가 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문득 했다.
내 주치의 선생님도 그때 나를 방문했다.
내가 불시적으로 입원을 한 데다가 아직 출산이 한달 반도 더 남았기 때문에, 주치의 선생님께 연락가는 게 늦었던 모양이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옥시토신을 넣고서도 한참 기다릴 지도 모르니까, 아직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정말 아기를 받고 싶었는데, 한 시간 뒤면 퇴근이라 아마 힘들겠네요'
라며 아쉽다고 말씀하시던 주치의 선생님은 가기 전에 한번 체크해보자며, 내 복부를 덮고 있던 이불 속을 들여다 보셨다.
남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때 이미 이불 밑이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아기의 머리가 살짝 보였다고 한다.

그때부턴 정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정말 몇 분도 안되어서, 주치의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의사선생님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이것저것 준비를 시작했다.
내가 어리버리 있는 동안 침대도 변형시켜서, 정말 '앗?'하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이미 분만자세에 들어가 있었다.

무통분만에 대해 염려하는 이유들 중 하나가 고통이 너무 없어서 언제 힘을 줘야 하는지 알기 힘들기 때문도 있었던 것 같다.
사람 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고통의 강도가 매우 미미할 뿐, 진통을 오는 것을 느끼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옆에 모니터를 보면 파형이 보이기 때문에, 그걸 보고 힘을 줘도 된다.)

33주 4일째인 아기는 아무래도 작은 편이었다.
한번 숨을 들이쉬고 두번 힘을 주는 걸 딱 세번 하고 나서, 거짓말처럼 아기가 태어났다.
막 태어난 아기는 생각보다 작았고, 생각보다 깨끗했다. (왠지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을거란 생각을 했는데.)
아기는 혼자 숨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듯이 울어댔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 작은 아기. 
그렇게, 남편이 돌아온지 2시간만에 우리는 미르와 첫 만남을 가졌다.

출산의 기억 (2) The baby and I

출산의 기억 (1)

출산의 순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주 대충정도는 육아밸리에서 읽어서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 아기 돌보는 법, 라마즈 호흡법 (마취없이 출산할 경우), 출산에 관련된 지식 등등 4-5가지 수업을 공짜로 제공해 주는데, 그 수업들을 다 33주-34주째 되는 때에 잡아놓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라마즈 호흡법이란 게 있다는 건 알지만 어떻게 하는지 몰랐고, 양수가 언젠간 터지는 건 알았지만, 정확하게 언제 터지는 건지는 몰랐다.
육아밸리에서 읽기로는 보통 양수 터지면 거의 출산에 임박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하는 정도의 느낌?
'유부녀의 탄생'의 환타님의 경우도 양수가 먼저 터진 경우라, 웹툰을 보며 진통이 오기 전에 양수가 먼저 터지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내 경우에는 환타님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느낌이 아니라, 시작부터 왕창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깜짝 놀랐다기보다는 '와- 이게 양수가 터지는 거구나'하는 멍한 느낌이 더 강했다.
나이 서른 넘어서 오줌보를 전혀 조정하지 못하고 막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두렵다기보다 좀 황당하달까 웃기달까.

헐래벌래 화장실에 가서 닦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왠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다행히도 남편 친구 전화번호는 찾기 쉬운 장소에 놔뒀었고, 남편친구는 신호음이 한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양수가 터져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지금 와 줄 수 있겠니?"

친구는 막 출근을 한 참이었다.
친구의 직장은 우리 집에서 차로 5 분 내의 거리다.

"지금 갈게."

라고 바로 대답을 듣고, 나는 챙겨뒀던 가방을 들었다. 
이런 친구를 둔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시계를 봤더니 딱 남편의 발표가 있는 세션이 끝날 무렵이었다.
친구는 거의 5분내에 집에 도착했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나는 남편에게 문자를 넣었다.

"헤이, 남편. 발표는 잘 했어?"

남편은 방금 발표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이랬다. 
사람들이 질문도 하고해서, 분위기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남편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하며, 폭탄같은 뉴스를 알렸다.

남편은 당장 여행사와 연락을 하고, 비행기표를 알아본 다음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나중의 이야기로는 꽤 패닉에 빠졌던 모양이었다. 불쌍한 남편. 

병원에 도착해서도 걷는 내내 양수가 다리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생리패드를 하긴했는데, 전혀 쓸모가 없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양수가 흐르는 게 느껴지니, 마음은 다급한데 빨리 걸으려니 더 많이 흘러내릴 것 같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출산 병동에 도착했다.

수속하는 데스크 앞에 도착해서 나름 다급하게 '양수가 터져서 왔어요'라고 말했으나, 데스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주 여유롭게 '알았으니까 좀 기다리세요'라고 말했다. 
하필이면 환자들이 많이 몰려와서 체크하는 병실의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는 응급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의 반응을 받으니 황당했지만, 기다리라는데 어쩌겠는가.
화가 나고 짜증이 나기도 해서 거의 오기로 그냥 서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금새 남편 친구가 주차장에 차를 넣고 돌아왔다.
친구가 다시 데스크의 사람에게 상황을 물어봤으나, 빈 병실이 없어서 좀 기다리라는 말 뿐이었다.

다행히도 지나가던 간호사가 이야기를 듣고는, 서 있지 말고 옆에 있는 휠체어에라도 앉아 있으라 해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양수는 이제 봇물처럼 흘러나오진 않아도, 쉼새없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마정도 기다렸을까, 간호사가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병실이 없어서 데스크 안쪽의 작은 공간에 커튼을 쳐 넣고, 일차 검사를 했다.
다행히 아기의 심박수도, 나의 바이탈도 별로 문제가 없었다.
그 순간 또 확 터져나오는 양수에 간호사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는 뭔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병실로 나를 안내했다.

입고 있는 옷을 다 벗고, 가운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누웠다. 
양수때문에 침대에 깔아놓은 시트는 금새 축축해져서 별로 편안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쩌겠는가.

양수와 아이가 세균에 감염될 때는 대비해서 항생제를 맞고, 아기에게 계속 수분을 공급하기 위해 식염수를 맞았다.
그리고는 계속 아기와 나의 심박수, 그리고 진통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긴 관찰기가 시작되었다.
상태를 체크하러온 몇몇 의사선생님들은 양수가 먼저 터진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몇 주 더 임신을 지속시킨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에, 상황을 보면서 가능한한 출산을 미루자고 했다.
아기의 폐가 완전히 성숙되는 시기가 34주인데, 양수가 터진 시기가 33주째 되는 시기니까 최소 일주일은 미루자는 거였다.
물론 이미 양수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식염수를 주입해서 아이에게 수분을 공급해줘야 한다.
의사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29주때 양수가 터진 임산부를 40주까지 버티게 한 적도 있단다.

갑자기 비상사태 점등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쯤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여행사를 통해서 알아봤을때, 가장 빨리 돌아올 수 있는 때는 다다음 날 오후고 개인적으로 알아봤을 때 가장 빨리 돌아올 수 있는 때는 다음 날 정오쯤이라고 한다. 다음 날 정오에 도착하려면, 문자 그대로 지금 짐 챙겨서 공항에 가야 하며, 런던에서 6시간인가 비행기를 기다려야 하는 나름 빡센 일정이었다. 물론 이런식으로 표를 바꾸기 위해선, 약 200만원정도 돈을 내야했다. 
결국은 남편이 좀 빡센 여행일정을 거쳐서라도 제일 빨리 돌아올 수 있는 비행기편을 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편은 학회장에서 호텔로 달려갔다. 앞으로 3-4시간 안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그 동안 남편의 친구분은 남편을 대신해서 나와 함께 있어주기로 했다.
진통이 살짝 느껴지긴 했지만 딱히 심한 정도가 아니라서, 나는 팀원에서 서류 작성 좀 해달라고 메일 보내고, 보스에게 현재 상황을 알렸다. 
이런 상황을 전혀 짐작도 못했을 보스와 실시간 이메일 대화를 나누며, 병실에 누워서 읽을 책들을 킨들에서 몇 권 사고 들어누웠다.

과연 얼마만큼이나 출산을 미룰 수 있을까?
의사선생님들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계속 병실에서 식염수를 맞으며 누워 있어야 한다는 거겠지. 
왠지 전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어쨋튼 왠지 느긋한 기분이 들어, 다운로드 받은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남편의 친구분은 그 동안 집에 가서 편안한 옷가지와 읽을 책들을 가져왔다.
집에 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며 병실에서 함께 자겠다고 한다. 
(오, 남편의 친구는 여자분이다.)
둘다 각자의 책을 읽으며 조용하게 시간을 보냈지만, 왠지 아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오후 쯤, 남편은 런던에 도착했다며 연락이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공항의 한 구석에서 6시간인가7시간을 보내야 한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라, 런던의 공항은 딱히 연 가게도 없고 한산한 모양이었다. 남편은 잠이 안 온와서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렇게 세 사람이 각자의 책을 읽으며, 얼마만큼 지속될 지 모를 입원 생활의 시작이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출산은 왠지 의사선생님의 예측과는 언제나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기로 결정되어진 모양이었다.
저녁 무렵부터 상당히 극심한 진통이 3-5분의 주기로 찾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출산의 기억 (1) The baby and I

31주에 초음파 사진을 보았을때, 아기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딱 50%수준의 크기였고, 아무런 문제 없이 시간은 지나가고 있었다.
몸이 살짝 무겁단 생각이 들고, 쉽게 피곤해졌다. 하지만, 일하는데 방해가 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면, 호르몬의 변화때문에 쉽게 눈물이 난다거나 하는 등의 변화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변화도 식성의 변화도 없이 평안하게 시간을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 32주 2일째 되는 날, 화장실 갈때마다 아주 약간 피가 묻어나왔다.
한 몇달 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어서 병원에 갔었는데, 3-4시간동안의 관찰 후에 별 문제가 없단 이야기를 들었었고, 며칠 전의 진료에서 별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심각한 증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폭풍 구글 검색을 하며 과연 괜찮은 일인가 병원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긴 했지만.
그렇지만, 피가 묻어나는게 하루내내 계속되니까, 혼자 걱정하느니 그냥 병원에 가서 체크받고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자는 결론을 내렸다.
'병원에 가서 3-4시간정도 시간 죽이고 올게요.'라고 보스에게 반농담을 던지며 오피스를 나섰다.
병원은 꽤 분주한 데다가 병실도 꽤 차 있어서, 한 두시간쯤 서서 기다린 다음에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자궁구가 1cm정도 열였단다.
내가 걱정하는 낌새를 보이기도 전에, 간호사는 자궁구가 그 정도 열린 상태에서 40주까지 가는 경우도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호사는 한 대여섯 시간쯤 더 두고 보자고 했다.
다 괜찮은데, 진통 측정기에 보이는 가진통이 너무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진통 측정기에 보이는 파형은 아주 정기적인 정규분포곡선들을 보이고 있었다. 주기는 약 2분 정도. 
나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일도 없이 또 5-6시간 누워서 지내겠구나- 싶었었다.

간호사는 링거로 식염수를 투여해 주었고, 서너시간 정도 더 상태를 지켜보자고 했다.
그 서너 시간 이후. 입원을 해야한다는 결론이 났다.
상태가 별로 나아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운전해서 3시간 거리에 있었던 남편에게 메세지를 보내고, 입원했다고 보스에게 메일을 날렸다.
조산을 방지하기위해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약을 맞고, 또 혹시 아기가 일찍 태어날 것에 대비해서 아기의 폐 성숙을 도와주도록 스테로이드 주사를 24시간에 한번씩 해서 두 번 맞았나 그랬다. (지금은 그 기억도 가물가물...스테로이드는 근육주사가 주사자리에 멍이 든게 이주도 넘게 갔다 - 뭐, 이런건 쓸데없이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 

왠지,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워낙 같이 일하는 여성분들이  다들 조산을 했고, 내 나이도 있었기 때문에 이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여성 동료들 중 3명이 30주도 되기 전에 아기를 낳았고, 아기들은 다들 건강하게 자랐다.
27주쯤 됬을 때 출장가서 만난 동료들은 내가 조산이 걱정된다고 하자, 30주 지나고나면 거의 문제없다며 나를 안심시켜 줬었다.
그래서, 이미 32주에 들어선 나는 어떻게든 현대의학이 아기를 살려줄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병원에서 이틀을 지내고 나자 상태는 호전되어서 주기적인 가진통은 사그러 들었고, 퇴원해도 된다는 이야길 들었다. 
자궁구는 아직 1cm정도 열린 상태였지만, 별 다른 주의 사항같은 것은 없었다.
내 주치의도 별 문제 없을거라고 했고. 
딱히 몸이 아프거나 하지도 않아서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남편의 유럽 출장이 바로 다음날이라는 것이었다.
출장이라고 해도 학회에 참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정말 원한다면 출장을 가지 않아도 됬다.
남편은 출장을 가지 말까 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나는 출장을 보내고 싶은 쪽이었다. 
남편이 일하는 실험에 관해서 대표로 발표를 하기로 한 학회였고, 이미 비행기표며 호텔일정이며 다 잡아뒀는데 취소를 해야만 하나 싶었다. 게다가 의사선생님들도 다음 주에 아기가 태어날 가능성은 10-40%정도라며, 중요한 학회라면 가도 괜찮다는 의견들이었다.

몇시간을 토론한 뒤에 남편은 출장을 가기로 결정했다.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 남편의 친구에게 차키를 맡겨놓고, 비상시에는 친구가 병원으로 데려다주기로 했다.
토요일 점심에 남편을 보내놓고, 나는 집에서 맘 편하게 쉬고 있었다.
평상시와 몸이 달라진 것도 없었지만, 남편에게 최소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겠노라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정말 나무늘보처럼 게으르게 하루를 보냈다.

일요일도 저녁까지 그렇게 늘어지게 보내며, 일이라고는 혹시나 싶어서 병원에 갈 때 가져갈 가방을 꾸린 정도가 다였다.
그렇게 하루내내 아무것도 안했으면, 문제없이 그냥 지나갔을까?
뭐, 지금 그런걸 궁금해 해도 결과를 알 수 있을리는 없지.
어쨋튼....
일요일 저녁 즈음에서야 월요일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기억났다.
수요일부터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정신이 없어서 미쳐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질 못했던 거였다.
사실 머릿속으론 알고 있었는제, 그렇게까지 중요한 서류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제출하지 말고 지나가자-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요일 저녁에 동료로부터 서류 제출을 할 건지 안 할건지 질문하는 메일을 받았던 거였다.
그냥 '개인적인 사정도 있고해서, 이번 서류 제출은 하지 않기로 했어요'해도 아마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몸 상태가 너무 보통때와 같은 것이었다.
딱히 작성하기 힘든 서류도 아니어서, '금새 작성해서 보내겠다'고 메일을 날리고 저녁무렵 천천히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왠지 집중하기가 너무 힘든것이었다. 
결국, 일을 하는둥 마는 둥 하다가, 내일 일찍 일어나서 작성해야지 하고 잠을 청했다.
지금 생각해도 왠지 그 밤의 잠자리는 묘했다. 자고 있는데도 왠지 반쯤은 일어나 있다고 기분이 드는 그런 잠자리.

월요일 아침, 생각처럼 일찍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했다.
저녁까지 제출하면 되니까, 두어시간 바짝 일해서 작성한 다음 사람들에게 보내면 되겠다 싶었다.
한 한시간 일하다가 사무실에 가서 계속 일하자 싶어 의자에서 일어난 순간, 갑자기 따뜻한 액체가 막 봇물처럼 다리사이에서 흘러내렸다.

그렇게, 33주가 되는 날, 양수가 터졌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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